섬사람을 향한 오마주 1
‘이제는 섬이다’ 정태균의 섬 타임즈
섬 주민들의 경험지식을 기어이 이어받아 현재에 전하고자 이 섬 저 섬 다니며 담아내고 있습니다. 현재는 ‘어쩌다 공무원’이 되어 ‘섬’ 이라는 이유로 섬 주민도 방문객도 불편이 당연시 되는 일이 없도록 섬을 가꾸고 있습니다. 섬진강물이 흘러 들어가는 전남동부지역의 섬 살이를 찐하게 싱싱하게 전하겠습니다.
섬사람을 향한 오마주(Hommage)
"이 섬의 생활 방식은 섬사람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무형문화유산이다. 다들 그 생활 방식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때문에 우리 같은 타지 사람들도 그 가치를 이해하고 소중히 대해야 한다. 그것이 섬 문화와 함께 가는 회사 경영이다. 섬에서 경제 활동을 하고 섬에서 살아간다고 하는, 진정한 의미에서 회사 경영인 것이다."- 아베히로시·노부요카료스케, ‘우리는 섬에서 미래를 보았다’ 중
# 섬은 그렇게 특별한 장소가 되어간다
물리적 접근성이 다소 떨어진 먼 바다에 있는 섬은 정서적 접근성을 가깝게 하고자 애쓴다. 한 번 섬에 들어가면 오래 머물고 싶은 섬으로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어 한다. 전통의 장소와 미래의 공간이 천천히 교감하며 장소애(場所愛)로 드러나고 있다. 미래의 곳간에 채워질 위대한 유산은 섬의 소소한 일상에서 조금씩 만들어지고 있다.
여수 섬 중에도 손죽도의 위상은 특별하다. 섬마을이 품은 돌담과 정원에 어울리는 품격 있는 사람과 특별한 장소로 거듭나고 있다. 손대도(손죽도의 옛 이름) 사람들이 만들어 온 해양치유의 문화가 요가, 운동, 걷기, 명상, 자연치료 등 탈라소 테라피(thalassothérapie)적인 문화로 이어져 상서로운 섬으로 인식되고 있다.
손죽도는 섬이 지켜온 유·무형의 자원을 많은 사람과 공유하는 다양한 방식을 준비하고 있다. 2017년 전라남도 주민주도 섬 가꾸기 사업인 ‘가고 싶은 섬’으로 각고의 노력 끝에 선정되기도 했다. 주민은 살고 싶고 관광객은 가고 싶게 만드는 섬 가꾸기는 방문객을 맞이할 마을 호텔과 식당, 마을을 감싸고 있는 탐방로와 소규모 공원이 조성되었다. 배움을 즐겨하고 선의의 경쟁에 기꺼이 함께하고 있는 섬사람들은 매년 주민대학과 선진사례 견학, 전문가 멘토링을 통해 섬의 시간과 속도에 맞춰 미래의 섬을 준비해 가고 있다.
보리수와 수국, 사시사철 야생화, 겨울 동백꽃, 가을부터 겨울까지 피어있는 억새꽃밭, 선착장부터 마을까지 이르는 야생화 꽃길, 돌담길, 자생하는 시누대 터널 등 손 닿는 곳 모두가 가드너 주민들이 작품으로 가꾸어 가고 있다.
먹을거리도 아주 풍부해 쏨뱅이 등 생선과 어패류, 고구마를 활용한 빼깽이죽, 야생 염소를 활용한 한방 염소탕과 구이, 시래기죽, 각종 한약재로 빚는 섬 막걸리도 일품이다.
무엇보다도 손죽도는 기품 있는 사람들이 매력적인 섬이다. 매년 손죽도의 날로 지정하여 섬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보탠다. 향우회, 동창회, 동문회, 경로잔치, 화전놀이 재현행사 등 손죽도의 이름으로 마음을 같이 하는 많은 사람이 고향 사랑을 자랑한다.
# 손죽도는 우리말 곳간이다
‘독 보듬고 돈디’, ‘손잡고 돈디’, ‘택걸이’, ‘깻독바’, ‘처녀 배짠디’, ‘날라리’, ‘옆걸음’, ‘지지미재’, ‘제주년 배떨어진디’, ‘몰따죽’, ‘보튼기미’, ‘댄머리’.
손죽도에는 순박한 토박이말이 많이 남아 있다. 이름만 들어도 그곳의 모양을 가늠할 수 있다.
‘독 보듬고 돈디’는 바위로 이루어진 해안에서 다른 지역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바위를 안고 돌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바위를 보듬고 돌고 나면, ‘손잡고 돈디’를 만나게 된다. 해변의 바위 절벽을 돌아가기 위해선 누군가 손을 잡아주어야만 하는 곳에 붙여진 이름이다. ‘날라리’는 힘든 길이 끝나고 평평하여 날아갈 듯이 편히 길을 갈 수 있는 곳을 말한다. ‘택걸이’는 턱을 괴고 조심스럽게 이동해야 하는 곳이며, ‘지지미재’는 날 받아 노는 화전을 부쳐 먹던 특별한 기억의 장소다.
기호는 서로의 약속이다. 땅이름 본래의 의미를 생생하게 전해준다. 일터를 기억하는 자연스러운 방식은 여전히 사람들의 과거를 회상하며 떠올려지는 이름들이다.
# 손죽도는 청년다움의 곳간이다
‘진중에 해 저무는데 바다 건너와, 병사는 외롭고 힘은 다하여 이내 삶이 서글프다. 임금과 어버이 은혜 모두 갚지 못하니, 한 맺힌 저 구름도 흩어질 줄 모르네.’
이대원 장군 절명시
1587년, 손죽도 앞바다에 침입한 대규모의 왜구와 전라좌수군이 벌인 전투에서 전사한 녹도만호 이대원 장군이 속적삼을 벗어 손가락을 깨물어 절명시를 남겼다. 선조 때 무과에 급제, 역대 가장 젊은 나이 21살 때 녹도만호가 되었고, 수군절도사로 임명됐으나 교지를 받지 못하고, 안타깝게도 22세의 나이에 전사했다. 꽃다운 스물두 살의 청년은 현종 때 병조참판으로 추증되었다.
1591년 전라 좌수사로 부임한 충무공 이순신이 큰 인물을 잃어 크게 손해를 보았다 해서 이 섬을 잃을 손, 큰 대 ‘손대도(損大島)’라 했다고 전해진다. 현지 주민들도 손대도, 손댓섬이라 부른다. 시누대가 많은 섬 손대도가 그렇게 역사와 교감했다. 청년 장수의 의기(義氣)는 마을 사람들에 의해 이어지고 있으며, 마을 가운데 위치한 충렬사에서 매년 음력 3월 3일 숭모제로 정성을 다하고 있다.
손죽도 마을을 수호하는 신으로 주민들의 마음속에 대대로 이어져 와 배가 닿는 댓머리와 섬 가운데 이대원 장군 동상이 자리하고 있다. 삼각산 아래 ‘똑바끝’과 ‘무구장 터’에 무덤이 있어 손죽도 해전에서 전사한 장군과 순직한 수군들의 숭고한 죽음을 기억하고 있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손죽도(損竹島)’로 개칭되었다.
정태균 전라남도 섬 가꾸기 전문위원
🎶 에디터의 노트 : 손죽도는 아름다운 자연과 풍부한 전통, 그리고 역사적 의미가 담긴 특별한 섬입니다. 이곳에서 느껴지는 주민들의 자부심과 노력은 정말 감동적이네요!👍